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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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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동 도산서원은 1560년 이황에 의해 건립된 서당으로, 그의 사후 사당과 함께 서원으로 정비되었다. 1574년 선조로부터 "도산서원" 현판을 하사받았으며, 조선 유학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제외되었고, 201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에 등재되었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 농운정사, 정우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교당, 상덕사, 시사단 등의 문화재가 있다. 1884년 서얼 차별 철폐 운동 과정에서 서얼들의 출입 요구가 있었으나 거부되었고, 물리적 충돌 끝에 1888년 출입이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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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도산서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도산서원
도산서원
종류서원
지정 번호사적 제170호
소재지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토계리)
지정일1969년 5월 28일
면적323,110m²
상세 정보
창건자이황
건립 시기조선 시대
유네스코 등재2019년
유네스코 기준(ⅲ)
유네스코 ID1498-004
유네스코 구역36.73 ha (90.77 에이커)
유네스코 완충 구역166.84 ha (412.25 에이커)
관련 정보
관련 문화재한국의 서원

2. 역사

'''안동 도산서원'''은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4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설립되었다.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과 함께 한국의 양대 서원으로 꼽힌다.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되었다. 1977년 관리사무소가 설치되었으며, 1975년부터 2007년까지 대한민국 1000원 지폐 뒷면의 디자인 소재로도 사용되었다.[5]

2019년 아제르바이잔에서 열린 제43차 세계 유산 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으로 등록되었다.

2. 1. 건립 배경

퇴계 이황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은 그의 생가이자 태실이 모셔진 곳이다. 이황1560년에 도산서당을 건립하였다.[5]

2. 2. 조선시대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이황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은 그의 생가이자 태실이 있는 곳이다.[5] 1560년 이황이 건립한 서당인 도산서당은 이후 그의 사후 사당과 함께 서원으로 정비되었다. 1574년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로부터 "도산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5]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년) 공사가 시작되어 1576년 완공되었다.[5] 이황이 작고한 1570년 이후, 1572년에 위패를 상덕사에 모시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5] 1575년 선조는 명필 한석봉에게 편액을 쓰게 하여 하사함으로써, 도산서원은 영남 유림의 본산이 되었다.[5] 1615년(광해군 7) 사림은 조목을 종향했다.

도산서원은 조선의 유학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존속되었다.

2. 3.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옥진각이 새로 세워졌으며, 이곳에서는 이황이 사용했던 문방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정희는 일본산 금송을 심었지만, 국민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베어졌다.[1]

3. 건축

도산서원은 1560년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건립한 도산서당1574년 이황 사후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서원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도산서원 단지는 크게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 선조 임금이 하사한 "도산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강당), 학생 기숙사인 농운정사, 네모난 연못인 정우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574년에 지어진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은 유생들의 자기 수양과 교육을 위한 강당으로,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1969년에 수리되었으며, 팔작지붕, 온돌방,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현판은 명필 한석봉이 선조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해진다.[1]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이황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도산서원 가장 뒤쪽에 있다. 1574년에 지어졌고 1969년에 수리되었다.[5]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옥진각이 새로 지어졌으며, 이곳에는 이황이 사용했던 문방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산 금송을 심었지만, 국민 여론의 반대로 벌채되었다.

3. 1. 도산서당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1560년에 건립되었다. 도산서당은 노출된 마루, 큰 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퇴계가 넉넉하지 못했기에 완공까지 4년이 걸렸다. 퇴계가 직접 쓴 글씨로 된 작은 현판 "도산서원"이 도산서당 끝 기둥에 걸려 있다.

도산서당 마루에는 나무 널빤지로 만든 연장 부분이 있다. 퇴계의 제자 정구가 더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마루를 연장할 것을 권했지만, 퇴계는 거절했다. 그러나 정구와 그의 제자들은 퇴계가 외출한 사이에 마루에 나무 널빤지를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이 부분의 마루는 건설과 외관 면에서 우아하지 않다.

정원에는 "정우당"이라는 작은 네모난 연못이 있는데, 퇴계는 이곳에 연꽃을 키웠다. 또한, 서쪽에는 살구나무를 심었다. 퇴계는 살구, 대나무, 국화, 소나무를 자신의 "벗"이라고 불렀지만, 특히 살구나무를 가장 사랑했다.

3. 2. 전교당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은 유생들의 자기 수양과 자제 교육을 위한 강당이다. 전교당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하였다. 팔작지붕, 온돌방,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선조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해진다.[1]

3. 3. 상덕사

이황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도산서원 가장 뒤쪽에 있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하였다.[5]

3. 4. 기타

도산서원 경내 동쪽에는 정우당이라는 작은 네모난 연못이 있는데, 퇴계는 이곳에 연꽃을 키웠다.[4] 서쪽에는 살구나무를 심었다.[4] 퇴계는 매화, 대나무, 국화, 소나무를 자신의 "벗"이라고 불렀지만, 특히 매화를 가장 사랑했다.[4]

도서관 - 습기로부터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 높게 지어졌다.

4. 문화재

5. 유네스코 세계유산

2018년 1월 문화재청은 안동 도산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 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신청하였으며, 2019년 7월 10일 아제르바이잔에서 열린 제43차 세계 유산 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1][2]

6. 시사단

정조는 규장각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 그곳에 있는 소나무 숲에서 영남 인재를 선발케 하고, 이를 기려 1796년 이곳에 단을 마련하고 비를 세웠다.[6]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숲이 사라졌으나 2009년 도산서원과 시사단을 잇는 다리가 가설되었다.[6]

7. 사건

도산서원은 학문 연마 기관이자 영남 안동과 주변 지역 사림들의 모임 장소였다. 1884년부터 1888년까지 서얼들의 서원 출입 허용 문제로 서원과 서얼들 사이에 큰 갈등이 발생했으며, 이 사건은 《도산서원서류사변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은 결국 서얼들의 출입 허용으로 마무리되었다.[1]

7. 1. 서얼 차별 철폐 운동

1884년 서얼들이 도산서원 출입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원에서는 끝까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했고, 서얼들과 서원 유사(有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1]

조정에서는 서자들의 서원 출입 허락 상소가 계속되자 1884년(고종 21년) 서얼들도 서원 출입을 허용하라는 공문인 관문(關文)을 각 관아와 서원에 하달하였다.[1] 1884년 11월 조정에서 하달한 관문에서 "서원에 서류들의 출입을 허용하라"고 하였다.[1] 그러자 경주 옥산서원은 곧 서얼의 서원 출입을 허락하였다.[1] 하지만 도산서원은 서자출입을 허용하는 것은 옥산서원의 사정이지 도산서원은 적용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1]

분개한 서얼들이 단체로 도산서원을 찾아와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1] 서얼들은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어찌 예안의 하늘이 경주의 하늘과 다르단 말인가"라고 했다.[1] 서얼들에게 서원의 수노(首奴)들은 몰매를 맞고 "피가 흘러 땅에 가득했고", 유사 등 임원은 서얼들에게 잡혀 "옷이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떨어지며 강물에 패댕이쳐지기도" 하는 등 갖은 수모를 입었다.[1] 이를 두고 서원 측에서는 "서원이 창건된 이래 다시없는 극변"이라 했다.[1] 사태가 진정된 후 도산서원에서는 이 사실을 기록해 놓았으며, 이를 《도산서원서류사변일기 陶山書院庶類事變日記》라 부른다.[1]

서자들이 출입을 요구하면서 폭력을 행사하자, 관망하던 군청이 개입했다.[1] 1885년 2월 10일 최대의 폭력 사건이 발생하여 "임원 모두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종손에게 욕하고 종택을 파괴하려 한다"며 관아에서 조사를 시작했다.[1]

관아가 개입하자 서얼들 무리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일부는 도망치고, 일부는 남아 있다가 붙잡혀 구금되고 일부는 자기 집안에 끌려가 문벌(門罰)을 받았다.[1] 문벌을 받은 서얼들은 관아의 판결에 불복하고, 이후 안동권 곳곳의 다른 서얼들과 연합하여 대립했다.[1] 결국 서자들과 도산서원의 갈등, 대립은 4년 1개월간 계속되었고, 1888년 12월 서자들의 출입 요구가 관철되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KBS Global https://web.archive.[...] 2009-01-27
[2] 문서
[3] 웹사이트 陶山書院とは https://kotobank.jp/[...] 世界大百科事典 2022-10-28
[4] 뉴스 韓国観光ニュース https://japanese.vis[...]
[5] 웹인용 도산서원/사원 소개 https://web.archive.[...] 도산서원 2008-11-26
[6] 뉴스 도산서원-시사단 35년만에 ‘상봉’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0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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